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206년, [[칭기즈 칸]]은 수십년간 이어지던 [[몽골]] 부족간의 분열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[[몽골 초원]]에 대한 통일 사업을 완수했다. 그는 지난 100여 년간 [[몽골족]]을 박해한 [[금나라]]에게 복수를 천명했고[* 칭기즈 칸의 조부 [[암바가이 칸]]이 금의 [[해릉왕]]에 의해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에 칭기즈 칸 개인적으로도 금나라는 꼭 복수해야 할 대상이었다.] 1207년 [[서하]]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함으로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뒤 [[몽골-금 전쟁|1211년에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했다.]] 금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몽골보다 우세했지만 [[전투종족]] [[몽골제국군]]의 어마어마한 전투력과 탁월한 전략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,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[[약탈]]과 살육을 자행하며 [[중원]]을 피로 물들였다. 금나라가 이렇듯 몽골의 침략으로 대혼란에 휩싸여있을 무렵, 금나라 치하에서 차별대우받고 있던 [[거란족]]은 이틈을 타 [[요나라]]를 부흥시키고자 세력을 일으켰다. [[야율유가]](耶律留哥)가 지휘하는 거란군은 [[요동]]을 장악한 뒤 대요국(大遼國)을 건국했다. 이를 [[동요(국가)|동요]](東遼)라고 한다. 야율유가는 스스로를 요왕이라 자칭했고 칭기즈 칸에게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하고 함께 금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제의했다. 이에 금나라는 거란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장군 [[포선만노]]가 이끄는 수 만의 병력을 파견했다. 그런데 포선만노는 [[동경#s-2.5|동경]]에 이르렀을 때 딴 마음을 품고 자신의 나라를 건국해 금나라 조정과의 관계를 끊었다. 국명은 처음에는 동진(東眞)으로 하였으나 후에 [[동하]](東夏)로 바꾸었다. 그러던 중 동요에서 몽골 복속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세력이 야율유가의 동생인 [[야율시불]](耶律厮不)을 추대해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대요수국(大遼收國)을 건국했다. 이를 [[후요]](後遼)라고 한다. 이후 후요는 몽골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몽골군의 주둔을 거부했다. 이에 몽골은 축출당했던 야율유가를 필두로 자신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한 동진/동하와 연합해 후요를 공격했다. 후요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거란 유민들은 남쪽으로 도주해 [[압록강]] 건너편의 강변에 이르렀다. [[홍건적|9만에 달하는 거란 유민들이 몽골군의 살육을 피해 살 방법은 오직 고려로 진입하여 재기하는 것 뿐이었다.]] 이렇게 거란 유민들과 고려 사이 전쟁의 막이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